베트남에 카페가 몇 개나 있을까? 2024년 Mibrand 조사 기준으로 50만 개 이상이다. 인구 약 1억 명이니, 200명당 카페가 1개꼴인 셈이다. 한국의 카페가 약 10만 개, 인구 5200만 명이니 520명당 1개. 베트남의 카페 밀도가 한국의 2.5배를 넘는다. 미국·중국·한국에 이어 세계 4위라는 통계도 있다.
그런데 이 숫자에는 함정이 있다. 한국의 “카페”가 에스프레소 머신과 인테리어를 갖춘 독립 공간을 뜻한다면, 베트남의 “카페” 상당수는 인도(vỉa hè) 위에 놓인 플라스틱 의자 두세 개와 보온병 하나다. 사업자등록 기준으로 집계하면 약 31만 7천 개(iPOS, 2023)로 줄어든다. 그래도 한국의 3배다.
왜 이렇게 많은가. 베트남 사람들이 커피를 좋아해서? 맞다. 하지만 식민지, 냉전, 그리고 B급 원두의 역설도 숨어있다.
프랑스가 심고, 동독이 키우고, 베트남이 거둬들인 커피
커피나무가 베트남 땅에 처음 뿌리를 내린 건 1857년, 프랑스 가톨릭 선교사가 아라비카 나무 한 그루를 북부에 들여오면서다. 그러나 한 그루의 나무가 ‘산업’이 되기까지는 30년이 더 걸렸다. 1888년, 프랑스 식민정부는 닌빈(Ninh Bình)과 꽝빈(Quảng Bình)에 최초의 커피 농장을 개설했다. 농장주는 프랑스인이었다. 보렐 르콩트가 하남(Hà Nam)에, 미셸 필립이 꽝찌(Quảng Trị)에, 로씨와 델판테가 닥락(Đắk Lắk)에…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듯, 초기 베트남 커피는 철저히 프랑스인의 사업이었다. 베트남인들은 땅의 주인이 아니라 농장의 노동자였다.

수확된 원두는 “Arabica du Tonkin(통킹 아라비카)”이라는 이름으로 프랑스에 수출됐다. 파리는 당시 이미 700개 이상의 카페가 있는 도시였고, 프랑스 혁명(1789년) 이전까지 세계 최대의 커피 생산·소비국이었다. 식민지 베트남의 커피는 본국의 수요를 채우기 위한 원료였다.
1920년대, 소규모 재배에서 상업적 플랜테이션으로의 전환이 일어난다. 프랑스는 중부 고원 떠이응우옌(Tây Nguyên)에 본격적으로 재배지를 열었다. 1912년에는 달랏(Đà Lạt) 인근 랑비앙(Langbiang) 산 기슭에서 현지 소수민족 크호(K’Ho)족을 고용해 아라비카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 크호족은 사실상 베트남 최초의 커피 농부가 된 셈이다. 닥락에서는 아라비카 대신 로부스타가 심어졌다. 로부스타는 아라비카보다 하급 품종이다. 맛이 쓰고, 거칠고, 향이 덜하다. 대신 카페인 함량이 두 배. 거기다 병충해에 강하고, 낮은 고도에서도 잘 자란다. 아라비카가 녹병(rỉ sắt)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져 나가는 동안, 로부스타는 버텼다.
1930년경 베트남 커피 수출량은 연 약 1500톤, 1940년에는 약 2000톤에 달했다. 원주민들의 피, 땀, 눈물로 생산해 본국으로 보내는 식민지 경제의 전형적 구조 속에서 커피는 고무, 쌀과 함께 베트남의 주요 수출 작물로 자리 잡았다. 한편 도시에서는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프랑스인이 가져온 카페 문화가 베트남 도시민 사이로 스며들기 시작한 것이다. 하노이와 사이공에 카페가 생겨났고, 20세기 초부터 커피는 도시 지식인과 상인의 음료로 자리를 잡아갔다. 프랑스식 필터 커피(café filtre)가 개인용 핀(phin) 필터로 변형된 것도 이 시기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전쟁으로 중단된다. 베트남 독립전쟁(1946~54), 그리고 베트남전쟁(1955~75)을 거치면서 떠이응우옌의 커피 농장은 황폐해졌다. 닥락 일대는 남과 북의 교차 지역으로, 전투가 빈번하지는 않았으나 인구가 대거 빠져나갔다. 1975년 전쟁이 끝난 뒤 커피 산업은 국영 농장 체제로 집단화됐고, 생산량은 바닥이었다.
이때 예상 밖의 조연이 등장한다. 바로 동독이다.
1977년, 지구 반대편에서 커피 위기가 터진다. 1975년 브라질 대한파로 세계 커피 가격이 폭등하면서, 경화(硬貨)가 부족한 동독은 커피 수입 비용이 연 1억 5천만 마르크에서 7억 마르크로 5배가 뛴다. 동독 정부는 궁여지책으로 커피 51%에 완두콩 분말·치커리 등 대용품 49%를 섞은 ‘Kaffee-Mix(카페믹스)’를 내놓았다. 동독 국민들은 이걸 “에리히의 왕관(Erichs Krönung·에리히스 크뢰눙)”이라 불렀다. 동독의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와 서독의 인기 브랜드 Jacobs Krönung(야코프스 크뢰눙)을 합친 조롱이었다. 신성한 커피에 저런걸 섞었으니 맛이 있었을리가. 더군다나 완두콩 분말이 커피 머신 필터를 막아 기계가 고장 나는 일이 빈번했다.

자국민의 불만을 감당할 수 없었던 동독은 사회주의 형제국가 베트남에 눈을 돌린다. 1980년 10월 20일 하노이에선 동독과 베트남 간의 협정이 체결됐다. 동독이 3200만 루블 상당의 차관, 트럭, 관개시설, 비료를 제공하고, 닥락에 1만헥타르 규모의 커피 농장을 조성한다. 대가는 향후 20년간 수확량의 절반. Kombinat Việt-Đức(비엣둑 콤비나트)라는 이름의 합작 농장이 탄생했다.

동독은 약 2000만 달러를 수력발전소 건설에 쏟았고, 주택·병원·학교까지 지었다. 독일 농업 전문가 지크프리트 카울푸스(Siegfried Kaulfuß)는 라이프치히에서 6000그루의 커피 묘목을 직접 들고 베트남에 왔다. 하노이에서 닥락의 성도 부온마투옷까지 3일이 걸렸고, 농장 부지에는 전쟁 때 남은 지뢰가 묻혀 있었다.
협정은 체결됐지만, 원시림을 깎아 도로를 내고, 발전소와 관개시설을 짓고, 묘목을 키워 밭에 옮겨심기까지 수년이 걸렸다. 로부스타는 나무를 심은 후 2~3년이면 첫 열매를 맺지만, 경제적으로 의미 있는 수확이 가능한 건 6~8년차부터다. 1986년경 첫 수확이 시작됐고, 동독은 연간 약 5000톤의 커피를 받기 시작했다. 동독은 엑싯(exit)을 꿈꿨다. 20년간 수확량의 절반을 가져가는, 확실한 투자 회수. 그러나 동독 국민들이 먼저 장벽을 넘어 서독으로 엑싯해버렸다. 대규모 수확이 궤도에 오를 무렵인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1990년 10월 동독은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동독이 해체 전까지 실제로 받은 커피는 총 약 6000톤이었다.
통일 독일은 커피 인수를 거부했다. 그러나 동독이 남긴 도로, 발전소, 관개시설, 그리고 무엇보다 8,600헥타르에 달하는 커피나무는 고스란히 남았다. 이 위에서 도이머이(Đổi Mới) 이후의 베트남이 자유 시장으로 나아갔다. 1990년대 닥락으로 대규모 인구 이동이 일어나 커피 재배 면적이 폭발적으로 늘었고, 2001년 베트남은 세계 2위 커피 수출국이 됐다. 통일된 독일은 현재 베트남 커피의 최대 수입국 중 하나다.
연유커피(cà phê sữa·까페 쓰어)에서 계란커피(cà phê trứng·까페 쯩)까지
프랑스가 가져오고 동독이 키운 건 로부스타였다. 세계 커피 시장에서 “B급”으로 취급받는 품종. 현재도 베트남 커피 생산의 약 90%가 로부스타이고, 아라비카는 10%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B급 원두”가 베트남 커피 문화의 독창성을 만들어냈다.
프랑스인은 커피만 가져온 게 아니다. 커피를 마시는 방식도 가져왔다. 프랑스 본국에서 즐기던 카페오레(café au lait)를 식민지에서도 재현하려 했다. 드립해서 내린 진한 커피에 따뜻한 우유를 섞는 카페오레. 문제는 우유였다. 동남아시아에는 낙농 산업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신선한 우유를 프랑스에서 가져오자니, 프랑스 남부에서 사이공까지 6000해리가 넘는 항해 동안 우유가 버틸 리 없었다. 설령 도착한다 해도, 냉장 인프라가 없는 열대 기후에서 신선한 우유는 하루를 넘기기 어려웠다.
해결책은 뉴욕에서 왔다. 미국의 게일 보든(Gail Borden)이 개발한 연유(sweetened condensed milk)는 냉장 없이도 오래 보관할 수 있었다. 프랑스인들은 이 연유를 식민지로 수입해 카페오레의 우유 대신 사용하기 시작했다. 1차 세계대전 중에는 프랑스 식민정부가 전비 마련을 위해 캔 우유 등 수입품을 베트남인에게도 할인 판매하면서, 연유가 베트남 가정에까지 퍼져 나갔다. 옹토(Ông Thợ)라는 이름의 베트남 연유 브랜드는 지금까지도 국민 브랜드로 남아 있다.
그런데 우연이 걸작을 만들었다. 로부스타의 강렬한 쓴맛과 연유의 진한 달콤함이 만나자, 아라비카+신선한 우유 조합과는 전혀 다른 맛이 탄생한 것이다. 카페오레가 부드럽고 균형 잡힌 음료라면, 베트남식 연유커피는 쓴맛과 단맛이 양극단에서 충돌하는 음료다. 이 강렬한 대비가 베트남 커피의 정체성이 됐다. 알루미늄 핀(phin) 필터 위에 커피 가루를 담고, 뜨거운 물을 부어 한 방울씩 천천히 내린다. 잔 바닥에 깔린 달콤한 연유 위로 검고 진한 커피가 떨어진다. 이것이 cà phê sữa(까페 쓰어, 연유 커피)다. 프랑스 카페오레의 베트남판이되, 원본과는 완전히 다른 음료. 냉장고가 없어서 연유를 썼고, 아라비카가 안 돼서 로부스타를 썼는데, 그 두 가지 “차선책”의 조합이 원본보다 강렬한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흥미로운 건, 냉장 기술이 보급되고 신선한 우유를 쉽게 구할 수 있게 된 지금도 베트남 사람들이 여전히 연유를 고집한다는 점이다. 길가 노점에 냉장고가 없어서가 아니라(물론 그런 곳도 있지만), 연유의 맛 자체가 “우리 커피의 맛”으로 정착했기 때문이다. 한계에서 출발한 해법이 정체성이 된 것이다. 바잉미(bánh mì)가 프랑스 바게트에서 출발했지만 지금은 완전히 다른 음식인 것과 같은 구조다.
더 극적인 변형이 있다. 1946년, 하노이 메트로폴(Metropole) 호텔의 바텐더 응우옌 반 장(Nguyễn Văn Giảng)은 또 다른 문제에 부딪혔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중이라 이번에는 연유마저 구하기 어려웠다. 커피에 넣을 게 정말 아무것도 없자, 그는 달걀 노른자를 넣었다. 노른자를 설탕과 함께 거품이 일도록 저어 커피 위에 올렸고, 그렇게 cà phê trứng(까페 쯩, 계란커피)이 탄생했다. 이후 호텔을 나온 장 씨는 꺼우고(Cầu Gỗ) 거리에 자기 이름을 딴 카페 장(Café Giảng)을 열었다.
‘카페 장’의 변천사는 그 자체로 베트남 현대사의 연표기도 하다. 1955년 공사합영(công tư hợp doanh) 정책으로 가게가 국가에 몰수됐고, 장 씨는 국영 체제에서 일하다 1969년 퇴직했다. 이후 돌려받은 항가이(Hàng Gai) 거리 집에서 공식적으로는 녹두차를 팔면서, 단골이 찾아오면 몰래 에그 커피를 내렸다. 사적인 커피 판매가 금지된 시절이었던 탓이다. 1986년 도이머이 이후에야 장씨는 합법적으로 다시 간판을 걸 수 있었다. 창업자인 장씨가 세상을 떠난 지금은 자녀 셋이 하노이 구시가 응우옌흐우후언(Nguyễn Hữu Huân), 옌푸(Yên Phụ), 딘띠엔호앙(Đinh Tiên Hoàng) 거리에서 각각 가게를 운영한다.

2019년 2월, 트럼프와 김정은이 하노이에서 만나는 제2차 북미정상회담이 열렸을 때, 하노이시는 국제언론센터에 제공할 대표 음식으로 퍼(phở), 분짜(bún chả) 등과 함께 카페 장의 에그 커피를 선택했다. 3000잔. 전쟁 중 우유가 없어서 달걀을 넣은 데서 시작한 음료가, 세계 언론 앞에서 하노이를 대표하는 음료가 된 순간이었다. 나는 이 북미정상회담과 맞춰 베트남 특파원으로 부임했고, 이때 프레스센터 앞에서 이 에그커피를 받아먹으려고 줄 서 있다가 베트남 기자한테 인터뷰 멘트를 따였고… 그렇게 첫 데뷔(?)를 했다.

정리하면 이렇다. 아라비카가 안 되니 로부스타를 심었다. 신선한 우유가 없으니 연유를 넣었다. 연유마저 없으니 달걀을 넣었다. 세 번의 한계가 세 번의 독창적 해법을 낳았고, 그 해법들이 지금 베트남 커피의 정체성을 이루고 있다. 한계가 만들어 낸 독창성. 베트남 커피 문화의 핵심은 이 점에 있다.
카페라는 사회 공간
카페가 50만 개씩이나 존재하는 이유는 커피 맛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카페가 사회 인프라이기 때문이다.
베트남에서 “밥 먹고 카페 가자”는 식사 후 표준 동선이다. 한국에서 “2차 어디 갈까?”와 같은 맥락이지만, 베트남에서는 거의 모든 사회적 만남이 카페에서 이루어진다. 친구와의 수다, 비즈니스 미팅, 연인 간의 데이트, 심지어 가족 모임까지. 베트남 사람들에게 카페란 무엇이냐는 나의 질문에 하노이의 한 카페 주인은 이렇게 답했다. “만남의 구실이지. 커피가 목적인 사람은 별로 없어.”
흥미로운 건 한국 카페와의 차이다. 한국 카페는 점점 혼자 앉는 공간이 되어간다. 혼자 공부하고 혼자 독서하는 공간. 하다못해 기자들에게도 기사 마감을 갈기는 ‘스자실(스타벅스+기자실)’이다. 하지만 베트남 카페는 여전히 함께 앉는 공간이다. 인도 위 낮은 의자에 마주 앉아 길거리를 바라보며 이야기하는 풍경이 베트남 카페의 원형이다. 베트남도 점점 ‘카공족’이 늘어난다지만 하이랜드 커피나 더 커피하우스 같은 현대식 체인에서도, 여전히 1인 좌석보다는 마주보는 좌석들이 많다.
한국인의 “언제 한번 밥이나 먹자”가 대개는 진짜 밥을 먹자는 게 아니듯, 베트남에는 “커피 한잔하자(uống cà phê đi)”가 있다. 취재원을 만나고 나서, 관공서에서 누군가를 소개받고 나서,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지인에게 — 헤어질 때 나오는 말은 거의 예외 없이 “다음에 커피 한잔합시다”다. 한국이라면 “밥 한번 먹읍시다”가 나올 자리에, 베트남에서는 커피가 들어가는 것이다.
하노이에서 이래저래 10년을 살면서, 이렇게 약속만 잡히고 실현되지 않은 커피가 한 300잔쯤 쌓여 있다. 내가 얻어 마시기로 한 것, 내가 사기로 한 것이 뒤섞여 있어서 장부 정리도 불가능하다. 대부분은 영영 마시지 못할 커피다. 그런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커피 한잔하자”는 말이 오간 순간, 관계는 이미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커피는 구실이고, 진짜 내용물은 관계다. 베트남 카페가 50만 개나 되는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
스타벅스가 못 이기는 이유
2013년 베트남에 진출한 스타벅스는 12년이 지난 2025년 기준 약 135개 매장을 운영 중이다. 인구 100만 명당 0.9개로, 동남아 주요 6개국 중 최저다. 같은 시기 하이랜드 커피는 800개 이상, 쭝 응우옌 E-Coffee는 676개를 운영하고 있다.
스타벅스가 고전하는 이유는 세 겹이다.
첫째, 가격. 스타벅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 6만5000동(약 3700원). 길가 카페의 카페 쓰어(연유커피)는 2만5000동(약 1400원). 2.6배 차이다. 베트남 직장인들 기준으로 로컬 식당의 점심 한 끼 식사비를 상회하는 가격이자 연유 커피를 두 잔 사마시고도 남는 금액이다.
둘째, 맛. 스타벅스의 주력은 아라비카 기반, 시럽을 섞은 부드러운 음료다. 로부스타의 진하고 쓴 커피에 길든 베트남 소비자에게 이건 싱겁거나 달거나다. 당장 내가 아는 거의 모든 베트남인들도 스타벅스에 가면 커피보다는 차를 마시거나, 티(TEA) 베리에이션 음료, 프라푸치노를 시킨다. 한국에서 유학한 경험이 있는 몇몇 소수의 베트남인들만이 ‘아아(아이스아메리카노)’를 찾는데 가만 보면 병원가서 링겔 찾는 사람들 같…
셋째, 문화. 스타벅스의 표준화된 공간은 어디서든 같은 경험을 제공하도록 설계됐다. 그런데 베트남 카페 문화는 정반대다. 동네 카페 주인이 이름을 불러주는 관계, 인도 위 의자에서 오토바이가 지나가는 걸 구경하는 경험, 핀 필터에서 커피가 한 방울씩 떨어지는 기다림… 이런 것들은 표준화 할 수가 없다. 그나마 고객의 이름을 직접 불러준다는 문화를 고수하던 스타벅스도 베트남에선 진동벨을 도입했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커피 브랜드가 유독 베트남에서 약한 이유는, 결국 베트남이 “커피를 수입하는 나라”가 아니라 “커피를 만드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원산지 국가의 소비자는 자기 제품에 대한 입맛과 자부심이 있다. 한국에서 외국산 김치가 안 팔리는 것과 구조가 같다.
세계 2위의 역설
2025년 베트남 커피 수출액은 역대 최고인 약 84~89억 달러에 달했다. 톤당 평균 수출 가격도 약 5,600달러로, 전년 대비 40% 이상 올랐다. 숫자만 보면 대성공이다.
하지만 그 수출의 약 85%가 그린빈(생두) — 가공하지 않은 원료 상태다. 부가가치가 가장 낮은 형태로 세계에 나가는 것이다. 베트남에서 kg당 몇 달러에 팔려나간 생두가, 유럽의 로스터리에서 볶이고 브랜딩되어 몇 배의 가격에 소비자에게 도달한다. 150년 전 프랑스 식민정부가 원두를 “Arabica du Tonkin”이라는 이름으로 본국에 보낸 구조와, 원료를 보내고 부가가치는 밖에서 붙는다는 본질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생산량의 90%가 로부스타라는 점도 구조적 한계다. 세계 프리미엄 커피 시장은 여전히 아라비카 중심이고, 로부스타는 주로 인스턴트커피 원료와 블렌딩용으로 쓰인다. 완성품의 이름에 베트남이 올라갈 자리가 없는 것이다. 네슬레의 네스카페, 스타벅스의 블렌드에 베트남산 로부스타가 들어가지만, 소비자는 그 사실을 모른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이 만들지만, 세계가 가장 높이 쳐주는 커피를 만드는 나라는 아직 아닌 셈이다.
흥미로운 역설이 하나 더 있다. 2024년, 베트남 국내 로부스타 가격이 사상 처음으로 아라비카를 역전했다. kg당 131,000동. 전 세계적인 로부스타 공급 부족과 베트남의 가뭄이 겹치면서 벌어진 일이다. 양적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품종이니 공급이 흔들리면 가격도 뒤집힌다. 그러나 이 가격 급등이 농민에게 이익만 가져다준 건 아니다. 농민들이 가격이 더 오르길 기대하며 원두를 쌓아두자, 수출업체는 계약 이행을 위한 물량을 확보하지 못했다. 일부 바이어는 아예 다른 공급처를 찾아 떠났다. 가격은 올랐는데 시장은 불안정해진, 전형적인 원자재 수출국의 딜레마다.
변화의 조짐이 없는 건 아니다. 스페셜티 커피 부문이 시장 점유율 12.3%에 연 7.3%씩 성장하고 있다. 럼동(Lâm Đồng)과 선라(Sơn La) 지역의 아라비카가 국제 대회에서 인정받기 시작했고, “파인 로부스타(fine Robusta)”라는 새로운 카테고리도 등장해 로부스타의 품질 재평가가 진행 중이다. 가공 분야에서도 움직임이 있다. 네슬레가 동나이(Đồng Nai) 공장에 7500만 달러를 추가 투자해 네스카페·네스프레소·스타벅스 브랜드 제품을 29개국 이상에 수출하고 있고, 쭝응우옌(Trung Nguyên)은 닥락에 7500만 달러 규모의 새 가공 공장을 짓고 있다. Highlands Coffee도 바리아-붕따우(Bà Rịa – Vũng Tàu)에 2000만 달러 규모의 시설을 가동했다. 생두를 보내는 나라에서, 볶고 갈고 브랜드를 입혀 보내는 나라로의 전환이 시작된 것이다.
1인당 소비량도 2015년 1.7kg에서 2023년 약 3kg으로 거의 두 배가 됐다. 연평균 성장률 6.6%. 국내 시장 규모는 2024년 약 5.1억 달러에서 2030년 11억 달러로 두 배 이상 성장할 전망이다. 쯩응우옌이 미국과 중국에 매장을 내고, 푹롱(Phúc Long)이 해외 진출을 모색하는 것도 이 맥락이다. 원두가 아니라 브랜드를 수출하겠다는 것이다.
한국과 비교하면 구조가 정반대다. 한국은 커피를 한 톨도 생산하지 않지만(소수의 커피농가가 있긴 하다), 스타벅스 매장 수 세계 3위, 1인당 소비량 세계 상위권의 “커피 소비 강국”이다. 베트남은 세계 2위로 커피를 만들지만, 소비보다 수출에 기대는 “커피 생산 강국”이다. 한국은 남의 원두로 자기 카페를 채웠고, 베트남은 자기 원두를 남의 브랜드에 넣어 보내고 있다. 두 나라 모두에 빠진 것이 있다면, 한국은 원두이고 베트남은 브랜드다.
베트남은 지금 “원료 공급국”에서 “커피 문화 수출국”으로 이행하는 중간 지점에 있다. 50만 개 카페가 말해주는 내수 시장의 깊이와, 84억 달러 수출이 말해주는 생산 역량 사이의 간극 — 이 간극을 메우는 게 다음 10년의 과제라 하겠다.

“카페 공화국 — 베트남에 카페가 이렇게 많은 이유”에 대한 3개 응답
재미있게 잘 쓰네. 정기구독 할께. 나중에 잘 엮어서 책으로 내면 좋겠네. 그래서 하나의 도움 오타 하나 있어. 연유에 옹토 벳남말에 ong tho 에 ong th 로 되어있네
감사합니다 늘근오빠^^
내용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