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명 대통령이 4월 19~24일 인도와 베트남을 연이어 국빈방문한다. 인도 뉴델리(19~21일) 방문에 이어 21일 저녁 하노이에 도착하는 이 대통령은 24일까지 3박 4일간 베트남에 머물면서 또 럼 당 서기장 겸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 레 민 흥총리 및 쩐 타인 먼 국회의장과의 면담, 비즈니스포럼 참석 등 빈틈없는 일정을 소화한다. 청와대가 이번 순방의 핵심 키워드로 ‘글로벌 사우스 외교의 본격 가동’을 내세운 만큼, 인도와 더불어 베트남은 한국 외교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전략적 파트너로서 그 위상이 재확인되고 있다.
상호 ‘첫 국빈’이 말해주는 것
지난해 8월, 또 럼 서기장은 이재명 대통령 취임 이후 첫 국빈으로 한국을 찾았다. 8개월 만의 답방인 이번 방문에서 이 대통령은 베트남 제14차 전당대회의 또 럼 서기장 연임 확정과 제16대 국회의 새 지도부 출범 이후 첫 베트남을 찾는 첫 국빈이다. 양국 정상이 상대국을 ‘새 출발의 첫 파트너’로 선택했다는 사실은 한-베트남 관계의 전략적 비중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베트남 관계는 1992년 수교 이래 급속히 발전해왔다. 2022년 12월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CSP)로 격상된 이후 양국은 모든 영역에서 협력의 깊이와 폭을 넓히고 있다. 2025년 교역액은 약 895억 달러(132조 4779억 원)에 달하며, 2026년 1~2월에도 전년 동기 대비 25% 증가한 170억 달러(25조 1634억 원)를 기록했다. 한국은 누적 등록자본 952억 달러(약 140조 9150억 원) 이상으로 베트남 최대의 외국인 투자국이며, 약 1만 개의 한국 기업이 베트남에서 활동하고 있다. 양국 국민 간 유대도 각별하다. 베트남 내 한국인 약 19만 3000 명, 한국 내 베트남인 약 33만 7000 명, 한-베 다문화가정 10만 가구, 연간 인적교류 500만 명 이상에 이른다.
글로벌 사우스 외교와 아세안 CSP 비전
이번 순방은 이재명 정부 대외전략의 두 축이 동시에 작동하는 자리다.
첫째, ‘글로벌 사우스 외교’의 본격화다. 14억 인구와 7%대 성장률의 인도, 그리고 10% 성장을 목표로 하는 베트남을 연이어 국빈방문하는 것은 글로벌 사우스와의 전략적·호혜적 협력을 한 단계 끌어올리겠다는 메시지다. 한국은 글로벌 웨스트(Global West)와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를 연결하는 ‘글로벌 커넥터(global connector)’로서의 역할을 모색하고 있으며, 식민 지배와 전쟁, 권위주의 체제, 경제 성장, 민주화를 단기간에 경험한 한국의 발전 궤적은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과의 대화에서 독자적 자산이 된다.
둘째, 대아세안 CSP 비전의 핵심 축 가동이다. 이재명 정부는 2025년 10월 한-아세안 정상회의에서 ‘꿈과 희망을 이루는 조력자(Contributor)’, ‘성장과 혁신의 도약대(Springboard)’, ‘평화와 안정의 파트너(Partner)’라는 세 가지 비전을 제시하고, 2029년까지 한-아세안 인적교류 1500만 명·교역액 3,000억 달러를 목표로 내걸었다. 이후 싱가포르·필리핀 순방(2026년 3월)을 통해 FTA 개선 협상, AI·SMR 등 미래전략산업 MOU 체결, 3억 달러 K-VCC 모펀드 조성 등 CSP 비전의 본격 이행에 착수했다. 아세안 10개국 중 한국과의 교역·투자·인적 유대가 가장 큰 베트남은 이 비전이 실질적 성과로 전환되는 시금석이다.

‘민족 도약의 시대’에 한국이 필요한 이유
베트남은 2026년 초 중대한 전환기를 거쳤다. 1월 제14차 전당대회에서 또 럼 서기장이 연임을 확정했고, 4월 제16대 국회에서 또 럼 서기장의 국가주석 겸직, 레 민 흥 총리, 쩐 타인 먼 국회의장 체제가 출범했다. 새 지도부가 내건 ‘민족 도약의 시대(kỷ nguyên vươn mình của dân tộc)’는 구호가 아니라 구체적 수치로 뒷받침된다. 2026~2030년 연평균 GDP 10% 이상 성장, 2030년 1인당 GDP 8500달러, 디지털 경제 비중 30%, 그리고 2045년 고소득 선진국 진입. 레 민 흥 총리는 취임 직후 ‘두 자릿수 성장’을 핵심 과제로 천명했다.
문제는 실현 경로다. 전당대회는 세 가지 전략적 돌파구(ba đột phá chiến lược)로 제도 완비, 고급 인력 양성, 현대적 인프라 구축를 제시했다. 정치보고서는 이 중 제도의 불완비를 “병목 중의 병목(điểm nghẽn của điểm nghẽn)”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한국은 이 세 축 모두에서 베트남이 찾는 파트너와 정확히 겹친다.
10% 성장의 물리적 전제: 에너지와 인프라. 두 자릿수 성장을 뒷받침하려면 전력 공급이 근본적으로 확충되어야 한다. 베트남이 원전을 재추진하고 전당대회 정치보고서에 “원자력 에너지 응용 산업”을 단계적 발전 대상으로 명시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은 UAE 바라카, 체코 두코바니 수주로 원전 수출국 지위를 확립했고, 싱가포르와 SMR 협력에도 합의했다. 2025년 8월 정상회담에서 체결된 원전 인력양성 MOU는 출발점이며, 이번 회담에서 건설·운영·안전관리 전반으로의 확대가 논의될 것이다. 에너지 안보와 맞닿아 있는 핵심광물 공급망도 마찬가지다. 베트남의 희토류·보크사이트 등 전략 광물 자원과 한국의 첨단 제조 역량이 결합되면, 양국 모두 특정 공급원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줄일 수 있다. 인프라 측면에서도 전당대회가 설정한 ‘현대적 인프라 구축’ 돌파구로 꼽히는 고속철도, 도시철도, 스마트시티는 한국 기업이 국내외에서 축적한 기술력과 시공 경험이 직접 적용될 수 있는 영역이다.
디지털 경제 30%의 현실 경로: 반도체·AI 생태계. 전당대회가 반도체 칩과 AI를 우선 육성 산업으로 명시한 것은 베트남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산업 생태계는 의지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설계-제조-패키징-테스트로 이어지는 반도체 밸류체인 어느 단계에서 베트남이 진입할 것인가, 그 진입을 가능하게 하는 인력과 기술은 어디서 오는가가 관건이다. 이 점에서 삼성전자를 비롯한 한국 기업이 이미 베트남에 대규모 생산기지를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은 단순한 투자 통계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비교 좌표를 짚어두자면, 대만 TSMC는 프런티어 파운드리 기술을 보유하지만 공급망을 본섬에 집중시키는 구조이고, 혼하이(Foxconn)는 IP 보유자가 아닌 위탁생산 주체여서 베트남 내 설계·소재 단계의 확장을 주도하기 어렵다. 일본은 과거 반도체 대국이었으나 메모리·OLED·2차전지 등 베트남이 진입을 모색하는 차세대 영역에서 비교우위가 약화됐다. 한국은 이미 현지에 완제품·부품 생산 거점을 운영 중이라는 점에서, 그 거점을 축으로 설계·소재·장비 단계로 베트남 생태계를 단계적으로 확장시킬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파트너다. 기존 제조 거점을 중심으로 부품·소재 생태계를 확장하고, 현지 인력의 기술 역량을 끌어올리는 것은 한국 기업의 공급망 안정화 이익과 베트남의 산업 고도화 이익이 정확히 만나는 지점이다. 23일 비즈니스포럼에서 AI·과학기술·에너지 전환이 중심 의제로 다뤄지는 것도 이 맥락이다.
고급 인력 양성: 이미 형성된 인적 토대 위에서. 앞서 짚은 50만 명 이상의 양국 국민 상호 체류, 10만 가구의 다문화 가정, 연 500만 명 인적교류는 양국 간 인적 네트워크가 이미 전략적 자산의 규모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 베트남은 대만·일본에도 각기 수십만 명의 근로자를 송출하나, 체류 경로의 성격이 다르다. 대만·일본에서 베트남 노동자는 주로 단순 제조·가사·돌봄서비스 영역에 집중되며, 귀국 후 국내 첨단 산업으로의 연결 경로가 제도화되어 있지 않다.
반면 한국의 EPS(고용허가제)·유학생 흐름·다문화 가정망은 숙련·준숙련·전문직 상향 경로를 포괄하며, 베트남 내 한국계 사업장이 귀국 인력을 흡수하는 순환 회로가 이미 작동한다. 문제는 이 네트워크를 산업 수요에 맞춰 질적으로 전환할 수 있느냐이다. 반도체·AI·원전 분야의 기술인력 양성 프로그램, 직업교육 협력, 한국 내 베트남 유학생의 첨단산업 현장 연계 등은 베트남 전당대회가 제시한 ‘고급 인력 양성’ 돌파구를 직접 지원하는 동시에, 한국 기업이 베트남에서 필요로 하는 숙련 인력 기반을 확보하는 경로이기도 하다. 총리 면담에서 한국 기업의 현지 애로사항 해소, 국회의장 면담에서 기업인·동포 체류 여건 개선이 다뤄지는 것 역시, 이 인적 네트워크의 제도적 기반을 강화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제도 완비: 세 돌파구 중 첫 번째인 제도 완비는 당 스스로 가장 무겁게 규정한 과제다. 14차 정치보고서는 제도의 불완비를 “병목 중의 병목(điểm nghẽn của điểm nghẽn)”으로 명시했고, 지난 2024년 12월 정치국이 채택한 Nghị quyết 57-NQ/TW(과학기술·혁신·디지털 전환에 관한 돌파)는 이 과제의 디지털 축을 구체화했다.
한국 경험의 접점은 두 갈래다. 하나는 전자정부다. 한국은 UN 전자정부발전지수(EGDI)에서 장기간 최상위권을 유지하며 공공 데이터 상호운용성·전자신분확인·행정 데이터 연계 분야에 성숙한 플랫폼을 축적했다. 베트남이 2025년 부처 통합으로 디지털 전환 추진 체계를 재편한 시점에, 한국은 개별 시스템 공여가 아닌 거버넌스 설계 단계의 협력 파트너로 기능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규제 샌드박스다. 원전·SMR, AI, 핀테크 등 본문에서 다룬 산업은 기술이 규범보다 빠르게 움직이는데, 한국은 2019년 이후 금융·ICT·산업융합·지역특구 네 축에서 5년 넘게 샌드박스를 운용하며 실패와 수정의 궤적을 축적했다. 이 경험은 공식 이전이 가능한 드문 유형의 공공재이며, 베트남이 신산업 법제를 단기간에 성숙시키는 데 한국이 비교우위를 갖는 접점이다.
지역 차원의 시너지
한-베트남 협력은 양자 관계를 넘어 지역적 함의를 갖는다. 베트남은 2027년 APEC 의장국을 맡을 예정이며, ASEAN 내에서 경제 규모와 전략적 위상이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 제14차 전당대회 정치보고서도 “ASEAN 내 중심적 역할 강화”와 “다자외교·기술외교 강화”를 대외 방향으로 제시했다.
보호무역주의가 확산되는 가운데 한국과 베트남 모두 규칙 기반 다자무역체제 수호와 공급망 안정화에 공통 이해를 갖고 있다. 한-아세안 FTA 개선 협상, RCEP 완전 이행, 디지털 세관·전자원산지증명서 등 무역 원활화 분야에서의 공조는 양국 모두에게 실익이 크다. 한국이 추진하는 ‘2026~2030년 한-아세안 행동계획’의 핵심 과제인 디지털 전환, 녹색 성장, 공급망 회복력, 인적자원 개발은 베트남 전당대회 결의의 주요 의제와 거의 정확히 겹친다.
1500억 달러를 향한 로드맵
양국은 2030년까지 교역액 1500억 달러 달성 목표를 이번 방문에서 재확인할 예정이다. 2025년 교역액 약 895억 달러에서 5년 내 60% 이상 성장이 필요한 도전적 목표지만, 2026년 초의 교역 증가세(1~2월 170억 달러, +25%)는 고무적이다.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기존 제조업 중심의 교역 구조를 넘어서야 한다. 반도체·전자 부품의 수직적 공급망 고도화, 디지털 서비스, 녹색 기술, 문화콘텐츠, 농식품 등 새로운 교역 영역의 개척이 필요하다. 베트남의 수출시장 다변화 전략과 한국의 공급망 재편 수요가 맞물리는 지점에서 새로운 기회가 만들어질 수 있다.
전망
1992년 수교 당시 양국 교역액은 5억 달러에 불과했다. 34년이 지난 지금 그 규모는 거의 200배 가까이 성장했고, 50만 명 이상의 양국 국민이 상대국에 거주하고 있다. 이 성장의 궤적이 보여주듯, 한-베트남 관계의 잠재력은 아직 완전히 실현되지 않았다.
베트남이 ‘민족 도약의 새 시대(kỷ nguyên vươn mình của dân tộc)’를 향한 야심찬 항해를 시작한 지금, 한국은 그 항해의 신뢰할 수 있는 동반자가 될 준비가 되어 있다. 22일 하노이에서의 정상회담이 양국 관계의 새로운 장을 여는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