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도 대학원생도 기도하는 베트남 ‘교육의 신전’ 문묘

박사과정 동기 언니에게서 잘로(베트남판 카카오톡) 메시지가 왔다. 남부에서 비행기를 타고 하노이를 오가며 코스웍을 들었던 이 언니는 논문계획서 심사를 앞두고 먼저 심사를 치르고 온 내게 이것저것 물어봤었다. 그게 고마웠는지 밥을 한번 사겠다길래 브런치 하면서 같이 논문계획서 살펴볼까? 했더니 그건 안된단다. 그 시간에 다른 동기와 문묘에 가서 기도를 하기로 했단다. 이때다 싶어 나도 조인했다. 이 언니도, 같이 가기로 한 동기도 이미 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석사 학위도 있고, 논문도 써봤고, 학생들 앞에서 매일 서면서 입에는 ‘과학’을 달고 사는 사람들이 공자 앞에 손을 모으고 머리를 숙이고 섰다. 어머니 유리안나 자매님은 카타리나가 거기에 돈까지 넣고 왔다는 사실을 알면 슬퍼하시겠지만…

하노이 시내 한복판, 동다구에 5만 4000㎡ 규모로 자리 잡은 이 공간은 흔히 관광 가이드북에 “베트남 최초의 대학”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절반만 맞다. 이곳은 대학이기 전에 공자의 사당이고, 사당이기 전에 과거시험 합격자들의 명예의 전당이고, 그 모든 것 위에 지금은 시험 합격을 비는 신전이다.

문묘-국자감 정문 양쪽엔 비석이 하나씩 서 있다. “下馬”(하마). 왕이든 뭐든,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다. 공자에 대한 예의다. 서울 성균관 앞에도 같은 비석이 있다. 그랩을 타고 도착한 나도 이 곳에서 내렸다.

10만동 지폐 위에 그려진 캠퍼스

정문을 지나 매표소에서 표를 사고 안으로 들어서면 규문각(Khuê Văn Các)이라는 2층 누각이 나온다. 둥근 창이 하늘을 향해 뚫려 있는 이 건물은 하노이시의 공식 상징이다. 천광정(Thiên Quang Tỉnh)이라는 정사각형 연못이 나오고, 양쪽으로 82기의 진사 비석이 줄지어 서 있다. 10만동 지폐 뒷면에는 이 모습이 그려져 있다.

문묘의 역사는 107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리 타인 똥(Lý Thánh Tông)이 공자와 주공, 사배(四配), 칠십이현(七十二賢)의 상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도록 한 것이 시작이다. 6년 뒤인 1076년, 다음 왕이 바로 옆에 국자감(Quốc Tử Giám)을 세웠다. 처음에는 왕실 자제 전용이었으나, 1253년부터 학력 우수한 서민 자제까지 입학이 허용됐다.

한국 사람들에겐 낯설지 않다. 서울 종로구 명륜동의 성균관. 앞쪽에 공자를 모신 대성전, 뒤쪽에 명륜당을 두는 ‘전묘후학(前廟後學)’ 배치가 하노이 문묘와 같다. 조선 성균관이 1398년에 세워졌으니, 하노이 문묘가 328년 앞선다. (이건 ‘조선’ 성균관만의 얘기고 그 뿌리는 고구려 태학-신라 국학-고려 국자감>성균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공자를 모시고, 유생을 가르치고, 과거시험으로 관료를 선발하는 시스템을 한국과 베트남이 공유했다는 사실은 두 나라의 유교적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준다.

시간이 지나야 돌에 새겨지는 이름

82기의 진사 비석에는 1442년부터 1779년까지의 과거시험 합격자 1304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2010년 UNESCO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흥미로운 것은 이 비석들이 합격 직후에 세워진 게 아니라는 점이다. 첫 비석이 세워진 것은 1484년이다. 그런데 이 비석에 기록된 과거시험은 1442년에 치러진 것이었다. 42년의 시차. 레 타인 똥이 비석 제도를 만들면서 과거 기록까지 소급한 것이다. 이후에도 대부분의 비석은 수년에서 수십 년이 지난 뒤에야 세워졌다. 이유가 있다. 합격 당시의 성적이 아니라 합격 이후의 삶이 비석에 오를 자격을 결정했다. 시간이 지나야 그 사람의 인품과 업적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베트남에선 석사를 thạc sĩ 라 부른다. 그럼 박사는 bạc sĩ 인가 싶겠지만 진사의 tiến sĩ를 쓴다. 석사학위가 있으면 이름 앞에 Ths.를 붙이고, 박사학위가 있으면 이름 앞에 TS.를 붙일 수 있다. 가운데 h 하나를 덜어내고, 끝의 s를 대문자로 키우기 위해 청춘을 바치는 셈이다. 아, Bạc sĩ는 의사다.

최초의 비문(1442년 과거분)을 쓴 턴 년 쭝(Thân Nhân Trung)은 이런 문장을 남겼다.

Hiền tài là nguyên khí quốc gia
“인재는 국가의 원기(元氣)다. 원기가 튼튼하면 나라가 강성하고, 원기가 약하면 나라가 쇠퇴한다.”

이 문장은 지금도 베트남 교육계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말 중 하나다. (교육행사 취재갈 때마다 듣는다)

공자 앞에 포도 올리기

선배님들(!)의 비석을 지나면 대성문(Đại Thành Môn)이 나온다. 이 안쪽이 문묘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대배당(Đại Bái Đường)과 대성전(Điện Đại Thành)이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대배당에는 초등학생 수십 명이 몰려 있었다. 흰 셔츠에 빨간 스카프를 맨 아이들. 너희도 박사되게 해달라고 빌러 왔니? 빨간 예복을 입은 의례 진행자가 경전 같은 것을 낭독하고, 교사들이 손을 모으고 있었다. 학교에서 아예 단체로 문묘를 찾아 의례를 치르는 것이다.

정작 학생들은 그닥 관심이 없어보였다. 너희는 학사부터 하고 오너라… 아, 학사는 cử nhân이라 부른다. 두 번째 단계인 향시에 합격한 사람을 부르던 舉人(거인)에서 온 것이다. 헌향식을 올리는 미래의 거인들을 보면서 대성전으로 발길을 옮겼다.

대성전 제단 제일 가운데에는 VĂN TUYÊN VƯƠNG을 모시고 있다. 문선왕(文宣王), 공자다. 동기가 어디선가 접시를 가져오더니 가방 안에서 주섬주섬 포도를 꺼내 제단에 올렸다. 기원전 551년에 태어난 공자 앞에 2026년산 포도가 놓였다. 그리곤 손을 모으곤 무언가 열심히 중얼거린다. 고개와 허리를 깊이 숙인다.

공자 양쪽에는 네 개의 좌상이 더 있다. 사배(四配) — 안자(顏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 공자의 핵심 제자이자 유교 도통의 전수자들이다. 서울 성균관 대성전에도 정확히 같은 같은 자리에 네 분의 상이 모셔져 있다. 동기들은 공자에게 기도한 뒤, 사배 네 분에게도 각각 합장했다. 대성전 양쪽 끝 칸에는 십철(十哲)의 위패가 나무 감실 안에 줄지어 꽂혀 있었다. 거기서도 기도했다. 빠뜨리는 곳이 없었다.

학의 가슴이 반질반질한 이유

대성전에서 나오자 그 사이 초등학생들의 헌향식이 끝나 있었다. 동기들과 대배당 정면에 섰다. “萬世師表”(만세사표, 만세의 스승이자 모범)라는 금칠 현판 아래에 대배당 제단이 있고, 양쪽으로 청동 학이 거북이 등 위에 서 있다. 동기들은 다시 한번 합장하고 기도하더니 이내 제단 양쪽의 청동 학에 다가가 가슴을 쓰다듬었다.

문묘에 오면 꼭 해야하는 미신(?)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거북이 머리 만지기’다. 진사비를 받치고 있는 거북이 돌상의 머리를 만지면 시험에 붙는다는 것. 워낙 많은 사람이 만져서 수백 년 된 돌의 문양이 닳아 사라지기 시작했고, 결국 당국이 울타리를 설치해 접촉을 차단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대배당의 청동 학과 거북이로 옮겨갔다. 학의 가슴과 거북이의 머리가 반질반질하게 닳아 있는 것은, 차단된 미신이 장소만 바꿔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증거인 셈이다.

포도가 돌아오다

성인들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의식을 마치고 마련된 전시 공간을 한참 둘러본 뒤였다. 동기 하나가 다시 대성전 안으로 들어가더니 아까 공자 제단에 올렸던 포도를 들고 나왔다. 접시는 다시 옆 책상에 가져다 놓더니 포도는 가방에 넣어 챙겼다.

공양해놓고 다시 가져가도 되나 싶겠지만 베트남 문화에선 자연스러운 행위다. 제단에 올린 음식은 신성한 기운이 깃든 ‘록(lộc, 祿)’이 된다. 참배가 끝난 뒤 가져가서 먹으면 복을 나눠 받는다고 여긴다. 절(chùa)에서도 사당(đền)에서도, 그리고 유교 사당인 문묘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 절에서 공양물을 나눠 먹는 것과 비슷한 셈이다. 유교 제례 공간에서 민간신앙 방식의 기도가 이뤄지고, 그 공양물이 복을 담은 음식으로 돌아온다. 이 한 장면에 베트남 특유의 ‘모든 것을 한 데 섞는’ 문화가 다 들어있다. 일명 짬뽕문화다.

한국은 왜 문묘에서 기도하지 않나

한국도 시험 앞에서 기도하는 나라다. 수능을 앞둔 어머니들이 절에서 삼천배를 하고, 절과 성당-교회에서 백일기도를 올린다. 시험 당일 교문 앞에서 엿과 찹쌀떡을 나눠주고, 경찰이 지각한 수험생을 오토바이로 호송한다. 교육열로 따지면 한국과 베트남은 세계 어디에 내놔도 뒤지지 않는다.

그런데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 한국 수험생과 학부모가 기도하러 가는 곳은 불교 사찰이나 성당, 교회다. 문묘나 성균관이 아니다. 서울 명륜동의 성균관 대성전에도 공자가 모셔져 있고, 사배와 십철이 있고, 배치도 하노이 문묘와 거의 같다. 봄가을로 석전대제(釋奠大祭)도 열린다. 하지만 수능을 앞둔 학부모가 문묘나 성균관에가서 합격을 비는 일은 없다.

왜일까. 한국에서 유교는 제례와 윤리의 체계로 남아 있지, 개인의 소원을 비는 신앙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간절히 무언가를 바랄 때 한국인이 찾는 곳은 절과 교회다. 반면 베트남에서는 불교, 도교, 유교, 민간신앙의 경계가 훨씬 유동적이다. 절에서도, 사당에서도, 문묘에서도 향을 피우고 절하고 소원을 빈다. 기도의 형식이 공간의 종교적 정체성을 압도한다.

같은 유교 문화권, 같은 과거제도의 유산, 같은 교육열. 그런데 “시험 앞에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다르다. 한국은 사찰과 성당으로, 베트남은 문묘로. 이 차이 하나에 두 사회의 종교 지형이 압축되어 있다.

본래 문묘는 유교 ‘제례’ 공간이다.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지 소원을 비는 곳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제례 공간이 기도처로 변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걸까. 단순히 ‘미신’이라고 치부하기엔, 제례 공간이 기도처로 변할 만큼 교육이 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무게가 크다는 뜻일 수도 있다. 시험 앞에서 갈 곳을 찾는 사람들이 불교 사찰도, 민간 사당도 아닌 ‘과거시험 합격자들의 전당’을 택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렇다.

어르신(cụ)들 바짓가랑이 붙잡는 일은 이 정도로 마무리하고 논문 얘기나 하러 카페로 자리를 옮기기로 한다. 나가는 길에 마주친 문묘의 응원과 격려.

“배움을 멈추지 말고, 먼 길을 가되 낙심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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